System Idle Talks/흔한 자산 목록

수제 핸즈프리 케이블

어­리 2013. 7. 29. 20:21

수제 핸즈프리 케이블. 구조 자체는 쉽기 그지없지만 처음으로 실용적인 것을 바닥부터 만들다 보니 희한하게도 만드는 데 공이 상당히 들었다. 고등학교 때 쓰던 알량한 핸즈프리 케이블이 박살났는데 비싼 가격에 같은 것을 사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만들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부터 안 쓰게 되어 집구석에 박아 두고 잊었던 것을 엊그제 재발견했는데, 때가 무지막지하게 껴 있더라. 마침 주변에 있던 물티슈로 박박 닦아서 거진 새 케이블을 만들었다. 사실 처음 재료를 구입할 때부터 케이블과 플러그 팁에 때가 상당했는데, 헝겊과 휴지로 닦으려 해 봐도 영 안 되길래 그냥 불량한 물건이려니 했던 것이 오래도록 때가 축적된 것이다. (...) 덕분에 물티슈의 위력을 절감했다.

이 케이블은 큐리텔 U-5000 휴대폰의 핸즈프리 케이블을 본딴 것으로, 흔히 핸즈프리 케이블이 그렇듯 4극 TRRS 오디오 플러그와 볼륨 부속, 모노 마이크로폰, 3극 TRS 오디오 리셉터클만을 포함한다. 다만 웃기는 게 있다. 휴대폰 쪽 4극이 지름 2.5mm이다... 아마 아무 3.5mm 이어폰이나 넣지 말라는 뜻인 것 같은데, 3.5mm 4극 핸즈프리 리셉터클에 3극 이어폰을 문제 없이 쓰도록 설계하기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의미가 없다. 당장 오늘날의 수많은 안드로이드 폰과 아이폰이 그렇지 않은가.

즉 문제가 하나 남았는데, 내게 2.5mm 4극의 의미는 모조품을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과도 같았다는 것. 이 지름 2.5mm 4극 플러그와 적당한 케이블을 구하는 어려움이 아주 고약했다. 3.5mm 4극도, 2.5mm 3극도 3.5mm 3극만큼이나 흔했지만 2.5mm 4극만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전주에 살다 보니 희귀한 부속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뿐더러 인터넷 부품 쇼핑몰에서도 2.5mm 4극은 거의 파는 곳이 없었다. 최근에 용산 쪽에서 큰 가게들을 돌며 시험 삼아 찾아 봤는데도 못 찾았으니 말 다 했다. 만들 당시에는 결국 오디오 케이블 전문점에 가서 공장에 주문해 재고를 가져 왔다. 그리고 무경험자로서 이 6개월 간의 사투에 질려 더 이상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다.

덧붙여,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위 사진은 바로 그 U-5000이다. 국내 유통 휴대폰의 경쟁력을 퍽 잘생긴 갈라파고스로 만들어 버린, 해묵은 위피(WIPI) 의무 탑재 제한이 풀리면서 나온 휴대폰 모델이다. 이 기종은 무선 인터넷 기능이 완전히 없었던 덕에 초기 호황을 누렸다가 바로 효도폰과 학생폰으로 둔갑했던 슬픈 이력이 있다. 왜 위피가 없다고 게임뿐만 아니라 인터넷이 안 돼야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마 통신사들이 아직도 붙잡고 있는 자체 생태계 싸움과 연관이 있었겠지 하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난 그 때부터 웹 브라우저 켜서 구글이나 트위터 접속하고 웹툰도 봤는데... 자기들이 MS 정도의 파급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심지어 MSN도 실패했는데 지금처럼 되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지금이 썩 좋은 생태계도 아니라 요모조모 따지자면 우리나라 소비자들만 불쌍하다.

이 기기의 장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나는 USB 전화 모뎀 기능이 그 중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안드로이드 폰에 USB 테더링과 와이파이 테더링이 빠지는 건 말도 안 되지만, 망 중립성같은 건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때라 데이터 통신과 전화와 SMS가 같은 망을 쓴다는 개념은 대중적으로 생소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델에서는 폰에서 모바일 네트워크를 못 쓰니 사실상의 보완 기능으로 전화모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모델에는 MP3 파일을 제조사/통신사 변환 없이 넣어도 된다거나, 테스트 모드의 자유도가 높다거나, USB 스토리지 기능이 충실하다거나 등등의 장점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못생긴 모델은 흥행에 실패하고 그냥 상징적인 과거로 남았다. 물론 위피와 비-위피 간의 싸움에는 패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10년을 못 가는 국책 연구에 몸바친 연구원 분들이 떠오르면 두말할 것 없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 지겨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조금 달리하기로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연구 자금이나 산출물이라는 게 흘러 가는 흔한 모양새에 비추어 보아, 국가 주도 연구 프로젝트의 상징적 장점을 그럭저럭 높게 사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피나 공인인증서처럼 한국형으로 시작해서 한국형으로 결론지어지는 프로젝트에는 아주 신물이 난다. 사실 무엇을 연구하든 국제 표준보다는 앞장서려고 하기 마련인데, 이런 연구의 최종 산출물은 보통 패션 센스가 모자라거니와, 나름 잘 만든 것마저 정치적인 이유로 세계에 공유되지도 않으니 학계는 뭔가 꼬리가 보일 때 나라를 위해 뒤쫓아 가는 셈이다. 이따위로 하려면 위대한 령도자 수령님의 계시로 만든 우수한 아무개와 다를 게 뭔가? 사실 이런 비판을 하찮은 내가 뱉을 수 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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