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앱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노트북 컴퓨터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일이 조금 많은 사람은 두 개씩 굴리기도 하고, 한 달에 하나씩 사들여 모으거나 되파는 사람도 있다. 요즘 세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나도 3년째 쓰던 것이 낡고 화면이 얼룩지고 키보드가 안 눌리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는 데다 배터리 수명도 다해서 최근에 새 시스템을 장만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KT나 SKT, LG U+ 인터넷을 써야 한다. KT에서는 KT 인터넷 망에 호환되는 전용 유무선 랜카드가 내장된 컴퓨터만 쓸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단 일정 돈을 내고 랜카드를 인증받은 후에 KT에 돈을 더 내고 유무선 랜카드를 등록해야 한다. 모든 유무선 통신기간망 사업자들이 이런 식이다. 결국 인증비를 못 내는 나는 이미 KT에서 인증한 노트북을 샀다. 제조사는 삼성전자. 세계를 주름잡는 대기업이니 한국 기업 중에서는 가장 품질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작동은 그럭저럭 깔끔했다. 외국 노트북 컴퓨터에 비하면 가끔 이해가 안 되는 곳에서 느려지거나 특정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느릴 때도 있었지만 그런 기능은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내가 이 컴퓨터를 샀지만, 이 컴퓨터를 마음대로 손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테마나 폰트를 바꿀 수도 없고, 바탕화면에 일정과 메모를 띄울 수도 없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싶어도 KT 마켓을 통해 KT에서 인증한 것만 가능하다. 게다가 삼성전자에서는 삼성 모바일 센터, 삼성 키스, 삼성 PC관리자, 삼성 PC백신 등의 프로그램을, KT에서는 KT 온라인관리자, KT 유해접속차단 등의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미리 설치해 놓았다. 이런 프로그램은 관리자 권한으로 설치되어 있어서, 내 일반 사용자 권한으로는 지울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 한 친구는 제조사와 모델, 통신사와 요금제의 조합에 따라 기본 프로그램이 심하면 50개 가까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쓰고 싶지도 않은 프로그램이 노트북 컴퓨터를 켜자마자 50개쯤 실행돼서, 시스템을 종료할 때까지 꺼지지도 않고 버티며 내가 컴퓨터에서 하는 모든 작업에 방해가 된다. CPU 시간을 잡아먹고 메모리 공간을 잡아먹으니 속도가 느려지는 건 당연하다. 못생겨서 쓸 때마다 거슬린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내 사용 정보를 통신사와 제조사로 보낸다고 알려져 있다. 애초에 노트북 컴퓨터를 쓸 때부터 그 프로그램의 이용약관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루팅은 시스템을 병들게 합니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이런 기본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인증받지 않은 프로그램도 설치하는 등등 시스템을 마음대로 손댈 수 있도록 관리자 권한을 가로채는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루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콘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이런저런 파일을 차례대로 조작해야 했기 때문에 꽤 어려웠지만, 요즘은 앱 마켓을 거치지 않고 관리자 권한을 요구하는 프로그램 실행 파일을 노트북에 설치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루팅을 하고 나서 일부 기본 프로그램을 지우지 않았더니 남아 있던 삼성 프로그램이 없어진 프로그램을 찾지 못해서 컴퓨터가 부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열을 일으키거나 다운되어 버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성전자 서비스 센터에 찾아갔는데, 최적화가 된 시스템을 루팅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니 소비자 과실이라고, 유상수리만 가능하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프로그램이 컴퓨터를 다운되게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까지 주절거린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다행히도 노트북 컴퓨터의 경우만 보자면 터무니없는 픽션일 뿐이다. 하지만 뭔가 강하게 연상되었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사실 이런 식의 강매와 끼워팔기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기성 사업자가 도태될 위험에 처할 때, 지배적 기업은 시장의 변화를 막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새로운 사업자의 진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이렇게 돈으로 돈을 버는 불공정한 행태가 어디에서나 영원히 용납되는 것은 아니라서, 결국 시장은 발전하고 독과점 기업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평판을 얻는다. 시장이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면 Microsoft의 Windows의 Internet Explorer, Media Player (Media Center), MSN Messnger (Live Messenger) 등이 있다. 이런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은 OS를 샀을 때 공짜로 제공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윈도우 OS를 살 때 함께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IE나 WMP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Windows OS의 API 중 IE나 WMP가 맡고 있는 부분이 꽤 크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음악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인터넷 익스플로러 끼워팔기는 미 연방 지방법원에서 벌금과 분할명령을 먹었고 1, 최근에는 미디어 플레이어와 라이브 메신저 등에 EU 집행위원회에서 시정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MS가 IE와 WMP를 이용해 다른 OS에서의 앱도 질식시켰으므로, OS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선택과 사용 가능한 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
안드로이드에 있는 통신사 기본앱의 경우에도 이런 시선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 알다시피 안드로이드는 하나의 완벽한 OS가 아니다. 따라서 제조사는 API를 만들거나 없애게 되고, 안드로이드는 사실상 제조사마다 꽤 다른 OS가 된다. 이때 기본앱은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제조사 기본앱은 마켓에 없고, OS 업데이트와 함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 사실상 OS의 일부다. 물론 안드로이드 상위의 API를 꼭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니, 제조사 기본앱을 다른 기기로 옮기거나(사실상 다른 OS로 가는 작업) 모두 지울 수도 있다. 이 판단은 루팅 후에 능력 있는 해커가 할 일이다.
한편 통신사 기본앱은 어떤가? 통신사 고유의 앱 마켓이나 앱 스토어에 올라 있고, 이곳을 통해 업그레이드받으며, 다른 통신사의 앱을 받을 수도 있다(약간의 트윅이 필요하기도 하다). 통신사들도 앱 시장 점유율을 위한 생태계 헤게모니 경쟁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을 정도다.
왜 당신이 승자여야 하는가
강자가 영원한 강자로 남는다면 수직적인 사회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회가 누구에게나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는 지금의 강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강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굳이 강자가 아니어도 좋다. 사회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앞에서 내가 시장의 패러다임을 언급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비 유행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행되는 현상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시장은 점점 개발 능력과 플랫폼에서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옮겨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변화가 특히 느린 편이다. IT의 결과물을 가져다 산업 전반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 IT 자체의 가치 창조에는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IT 시장에 대한 해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기업 위주의 해석보다 인적 자원 위주의 해석을 강조할 뿐이다. 진정한 인적 자원은 그 사람의 실무 능력이나 성과물에 무관한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앱 시장을 독과점하려 한다. 그것도 이미 기업 수준의 시장 지배력 강화일 뿐이다. 개인이나 소기업 개발자가 아이디어로 성공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꿈에나 가깝다. 자본으로 자본을 벌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기는커녕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기 떄문이다. 처음의 시장과 소비자 이야기로 돌아가더라도, 과연 기본앱 따위의 수단으로 신생 아이디어를 죽이고 자원을 독과점하며 소비자를 강제하는 사업자들에, 권리를 찾겠다는 소비자를 싸잡아 규칙 위반이라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이건 앞으로도 상당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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