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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디카의 흔적

어­리 2013. 7. 13. 17:20

오랜만에 (?) 가족들이 있는 집에 와서 내 방을 정리하다 문득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 모셔두고 있는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방 정리를 어김없이 방해하는 바로 그 현상이다. 오늘부터는 아예 그걸 잘 정리해서 다시 정리를 방해하게 놔 두지 않을 생각이다. ㅋㅋ

그 첫 타자가 바로 이 디카 리모콘.

내 초등학교 졸업 선물은 디지털 카메라였다. 모델명은 아마 삼성 케녹스 C410 정도였던 것 같다. SLR이 보급되기는 멀었던 시기였으니 (사실 지금도 SLR이 보급이 되고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당연히 똑딱이였고,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리모콘에도 촬영 버튼 하나뿐이며 줌이나 초점 갱신같은 건 없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CCD와 LCD를 사용했던 동글동글한 귀여운 보급형 모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 나는 필름 카메라를 썼는데, 가족 소유의 괜찮은 카메라가 하나 있고, 내가 집 구석에서 발굴해 낸 전기를 안 쓰는 카메라가 하나 있었다.

나는 졸업식 열흘쯤 전에 박스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더 좋은 것을 사지 못해 아쉬운 눈치였으나 (사실 아버지께서 고르고 할머니께서 사 주셨다), 나는 그 디카에 대해 거의 완벽한 자율성을 보장받았고, 모든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가족은 2년쯤 후에 더 좋은 카메라를 사기로 했고 나는 2년 후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졸업식 날이 되었다. 느닷없이 카메라와 작별인사를 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 가장 허무하게 잃어버린 것일 것이다.

졸업식은 즐거웠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내 사진, 친구들 사진, 가족 사진 등등 닥치는 대로 찍고 다녔다. 기념으로 맛있는 걸 먹고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꾹꾹 정리하며 괜히 감상에 잠겨 봤다. 한참 자고 일어나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 졸업식에 미처 못 오신 할머니 댁으로 걸어 갔다. 도착해서 사진을 보여 드리려니 카메라가 없는 것이다. 돈과 사진이 정말 터무니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내가 전자기기를 지나치게 몸에 가깝게 지니고 다니고, 한편 지나치게 정들지 않으려 애쓰며 내 몸처럼 다소 험하게 다루는 것은 이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무언가를 덜 잃어버리게 된 것도 아니고, 무언가 고장나는 데에 무감각해지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진 속의 작은 리모콘 외에도 그 카메라 전용인 케이블 따위가 있지만 세월이 흐르며 다른 케이블들과 마구 섞여서 찾아 내기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것만 아직도 내 책상 위에 멀쩡히 굴러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