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성교육이라는 게 있었다. 요즘은 수준별 맞춤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각급 학교의 자율로 완전히 넘어온 개념인데, 한때 지역 교육청마다 방학 중 영재교육 프로그램처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대상으로 수월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영재교육같은 큰 문턱은 없지만 자유롭게 신청해서 수업을 듣고 수료증도 받는 방과후 교실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배운 개념들은 학교 진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실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등장하는 내용인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하자면 아무래도 그 수월성교육 커리큘럼 정도로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튜닝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실제 교육 과정은 점점 재미는 없고 어려움만 더해지는 식으로 거꾸로 가고 있지만.
전북교육청 수월성교육은, 흔히 영재교육이 그렇듯, 자연과학의 네 가지 분과와 수학, 그리고 컴퓨터를 포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중1 때 교육청 영재교육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그 해 여름방학 동안 운영하는 2주짜리 수월성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분야는 화학으로. 당시에만 해도 나는 물리보다 화학을 좋아했다. 2주 동안 우리는 주로 신기하고 재밌지만 상당히 널리 알려진 재연실험을 했고, 원리를 깊게 공부하기보다는 협동해서 실험 계획서와 보고서를 쓰고 실험 전체를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여기서 느꼈던 갈증은 얼마 후 내가 부모님의 지원으로 고등학교 하이탑 전권을 지르는 계기가 된다. 1
여름방학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화학 시간을 마치고 다른 과목 교실을 기웃거리고는 했다. 겨울방학 때에도 수월성교육을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책들을 그 때 알게 되고 뒷목을 잡았다. 중2부터는 지원을 못 하던가, 아마 그런 이유로. 나는 수학과 컴퓨터 사이에서 상당히 갈등하고 있었고, 아예 당장 저 교재를 얻어 혼자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교육 기간 마지막 날에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 교재를 부탁했고, 수량을 맞춰 찍기 때문에 올 여름에는 어렵지만 오는 겨울에는 제본 비용만 낸다면 책을 줄 것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겨울은 컴퓨터로 정해졌다. 돌아보면 컴퓨터 분과는 사실 그다지 재미없었다.
한용희 선생님은 다음 해에 어딘가로 소속을 옮기셨고 나중에 전북과학고에 찾아가서 다른 선생님의 안부를 전하게 되었다. 내가 전북과학고에 떨어졌으니 그 뒤로는 무엇을 하시나 알 길이 없다. 한편 cein21.net이라는 전북교육청 소속 사이트는 교육 멀티미디어 자료를 배포하고 학생들의 접근성을 높여 주는 좋은 웹사이트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교육청 소속 포털은 어느 지역이든 3년을 못 가고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다. 거기 공들여 자료를 채우는 선생님들만 헛된 고생한 게 된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이런 사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교육청 분들은 제발 더도 덜도 말고 5년은 쓸 생각으로 전담 팀을 만들고 제대로 된 업체에 수주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해, 나는 전북대 영재교육원의 컴퓨터 분야가 중1 외에도 신입생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운좋게 합격해 이곳을 다니게 된다. 그 이후 이런 출판되지 않은 교재는 나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개중에는 저작권 문제도 있고 그냥 일회성 교재 포지션이 어울리는 것도 있지만, 수정과 보완을 거쳐 출판되는 것도, 출판의 번거로움 때문에 잊혀지는 교재들도 있다. 이 책은 다시 보자면 프로그램 코드만 넣으면 TAOCP에 필적할 책이라는 느낌이라 매우 아쉽다. 이처럼 세 번째가 가장 아쉬운 경우지만, 사실 어떤 책이든 잊혀지는 건 아쉬운 일이다. 생각하면 이런 제본만 된 책만 모아서 책방을 운영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 언어와 영어는 영재교육 분과에는 있었는데 수월성교육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사실 난 왜 인문사회 분야는 영재교육이 잘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인문학을 하면 먹고 살기 어렵다거나 전공대로 먹고 살지 않는다거나 하는 인식이 크기 때문일까. 에이, 근데 요즘 기자들이 기술 문야에 인문학 많이 갖다 붙이잖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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